온 가족이 함께 읽는 인천의 하천이야기⑤ - 부평의 젓줄 판개 - 굴포천은 삼돌목의 피안처
온 가족이 함께 읽는 인천의 하천이야기⑤ - 부평의 젓줄 판개 - 굴포천은 삼돌목의 피안처
  • 사무국
  • 승인 2007.10.10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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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돌풍‘과 ’손돌목 추위‘라는 옛말이 있다. 모진바람과 매서운 추위를 뜻하는 말이다. 이 말은 강화군 길상면 광성진과 김포군 대곶면 신안리 사이의 험악한 수로인 ’손돌목‘에서 유래한다.
삼남지방에서 올라온 대동미가 서울 한양으로 가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해상로가 바로 손돌목이었다. 해운으로 운송됐던 대동미는 서구 원창동 ‘갯말’전조창에서 밀물 때를 맞춰 손돌목을 거쳐 한강을 거슬러 올라간 뒤 용산의 경창으로 옮겼다.
하지만 손돌목은 범인들의 왕애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수로 바닥에는 사슴뿔 모양의 암초가 수도없이 깔려있었고, 소용돌이 치는 여울 탓에 노련한 사공이 아니면 건널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 곳이었다.
게다가 물이 밀려왔다 쓸려나가기까지 만조시간은 5시간 남짓하고 바닷물이 가장 많이 들어와 수위가 가장 높은 ‘사리’때 수심이 고작 5.5m에 머물렀다. 수심이 가장 낮은 ‘조금’에는 평균 수심이 4m에 불과했다.
김포면 대곶면 신안리 덕진포대지 돌출부에 ‘주사손돌공지묘’라 새겨진 손돌목의 일화는 이렇다.
1231년 고려 고정이 몽고의 난을 피해 배를 타고 이곳을 지나고 있었다. 하지만 앞은 꽉 가로막혀 보이지 않고 물살은 사나워 배가 조리질 쳤다. 사공 손돌이 노를 젓는 배는 곧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고종은 ‘사공이 나를 죽이려한다’고 크게 화를 내며 손돌의 목을 치라고 엄명을 내렸다. 손돌은 죽기 전 뱃머리의 바가지를 바닷물 위에 띄우며 ‘백실이 위험하니 내가 죽더라도 바가지를 따라 노를 저으라’고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주검이 된 손돌을 강가에 묻자 하늘에는 먹구름이 뒤덮고 광풍이 휘몰아쳤다. 배는 미친 듯 격랑에 가랑잎처럼 춤을 추기 시작했고, 죽은 손돌의 뒤를 이어 노를 잡은 사공은 아연실색 기가 질려 제대로 노를 젓지 못했다.
다급했던 고종은 손돌의 유언대로 사공에게 바가지를 따라 노젓기를 명했고, 천신만고 끝에 험난한 여울에서 빠져나왔다.
그 후 서울로 환궁한 임금은 손돌의 무덤 앞에 사당을 짓고 손돌이 죽은 10월 20일에 제사를 지내 원혼을 달랠 것을 신하들에게 명했다. 공연히 의심해 손돌을 죽인 차뫼의 뜻이었다. 현재 손돌의 묘지에 세운 사당은 오간데 없고 김포시가 세운 묘비만이 서 있을 뿐이다.
이 손돌목은 굴포와 무관치 앖다. 옛날의 대규모의 물량 수송수단은 거의 수운이었다. 하지만 한양으로 이르는 손돌목의 험난한 여울로 막대한 피해가 불가피했다.
이 피해를 덜기 위한 방책이 인천 앞바다에서 한양을 곧장 연결하는 새로운 수운의 건설이었다. 이것이 바로 지금 말이 많은 경인운하다.
이 경인운하는 당장 어제 오늘의 얘기만은 아니다. 강을 파기로 처음 구상한 때는 고려 고종 때로 지금으로부터 776년 전의 일이다. 실제 한강변 신곡리에서 부평 뜰을 가로 지르는 60리의 수로를 곧게 뚫어 직포를 내고, 서해 인천교 갯골창에서 부평 원통이 고개 앞까지 국책사업으로 굴포 공사를 한 것이 470여 년 전인 조선 중종 때다.
인천시 서구 백석동에서 겨기도 김포시 고촌 전호리까지 길이 18km, 폭 100m, 수심6m의 수운을 건설하는 국책사업인 경인운하는 800년 전의 과거와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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