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가족이 함께 읽는 인천의 하천이야기⑤ - 원통이 고개의 비애
온 가족이 함께 읽는 인천의 하천이야기⑤ - 원통이 고개의 비애
  • 사무국
  • 승인 2007.12.10 13: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부평 삼거리에서 간석 오거리에 이르는 재를 ‘원통이’또는 ‘원테이’고개라고 부른다. ‘원테이’는 원통이 고개(元通峴.圓桶峴)가 변한 소리다.

원통이 고개의 원래 위치는 지금의 이곳이 아니다. 부평공원묘지 입구에서 약사사 앞(지금의 인천지하철공사 앞)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원통이였다. 하지만 경인산업도로가 지나가면서 고개의 이름도 함께 옮겨 가게 됐다.

고개 이름이 하필 원통이일까? 전해오는 곡절들은 이렇다. 태조 이성계는 송도에서 한양으로 천도를 결심하고 무학대사를 시켜 도읍지를 물색하게 했다.
무학이 부평에 이르러 둘러보니 한강을 낀 벌판이 드넓었다. 더군다나 예로부터 ‘골짜기가 100개에 달해야 도읍지로서 탈이 없다’는 설을 따져보더라도 부평은 도읍지로 손색이 없었다.
무학은 태조에게 아뢰었고, 태조도 흡족해 했다. 무학은 어명을 받들어 주안산(侏雁山)에 있는 주안사에서 산신제까지 지냈다. 태조가 신하들과 함께 부평에 당도해 지세를 살피고, 골짜기를 세어보니 그 수는 한 개가 모자라는 아흔아홉 개였다. 한 개가 언덕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었다.
이때 무학이 도읍지로 부평을 포기하면서 내뱉은 말이 ‘원통한 지고’였다. 이 말이 곧 원통이 고개로 됐다는 일설이 있다.

또 다른 설은 조선 중종 때 김안로의 굴포와 연관된다. 한양 천도 후 삼남지방의 세곡(稅穀)을 뱃길로 용산 경창(京倉)에 실어 나랐다. 목포와 군산, 당진 지방에서 선단을 이뤄 해상을 통해 세곡을 서구 원창동 전조창에 집결시켰다.
물때를 맞춰 강화‘손돌목’을 거쳐 용산에 배를 대곤 했다. 하지만 물살이 세고 지형이 험한 손돌목에서 나룻배가 좌초하는 등 피해가 빈번했다.

김안로는 궁리 끝에 세곡의 피해를 막는 묘안을 짜냈다. 한강과 서해를 연결하는 운하를 뚫는 것이었다. 한강변 신곡리에서 부평 뜰까지 수로를 뚫었다. 하지만 최대의 난관은 서해 인천교에서 한양으로 향하는 중간지점에서 만난 원통이 고개였다.

석산으로 암반이 깔려 있는 이 고개는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뚫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원통이 고개만 관통하면 완전 통수가 가능해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인력으로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엄청난 고생을 하고도 이 고개 하나 탓에 온전한 수로를 만들 수 없었던 김안로는 땅을 치며 탄식했다. ‘원통(怨痛)하다, 이 고개가 웬수로구나...’라며. 여기서 나온 이름이 원통이 고개다.
아직까지는 후자의 얘기가 원통이 고개의 어원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그렇게 애를 썼지만 뚫지 못한 고개는 어느 지점일까 하는 의문점이 생긴다.
지금의 원통이 고개는 경인산업도로로 비교적 가파른 지형에 해당하는 곳이다. 그 동쪽은 이 보다는 경사가 심하지 않은 얕은 고개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부평방향의 굴포작업 지점은 원통천을 따라 부평 삼거리에 이르렀을 가능성이 높다. 또 인천 쪽에서는 주안염전의 갯골을 따라 간석 오거리에서 약사사 길을 따라 돌우물 못 미쳐 부평 삼거리로 향했던 작은 고개였을 개연성이 높다.
하여튼 도읍지가 못 되서 그렇건, 운하를 뚫지 못해서 그렇건, 여러 속설로 미뤄 짐작할 때 원통이 고개로 이름 지어진 연유는 분명 못 다 이룬 꿈에 대한 한(恨)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하천살리기추진단 - 
  • 인천광역시 연수구 갯벌로 12 1503호(미추홀타워)
  • 대표전화 : 010-3238-5490
  • 팩스 : 032-440-8686
  • Copyright © 2013 Icriver.or.kr. all rights reserved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