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가족이 함께 읽는 인천의 하천이야기⑦ - 굴포천과 부평 뜰, 그리고 수리조합
온 가족이 함께 읽는 인천의 하천이야기⑦ - 굴포천과 부평 뜰, 그리고 수리조합
  • 사무국
  • 승인 2008.01.11 16: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천시 부평구의 뜰이 본격적인 농토로 변모한 시기는 일제강점기로 조선총독부의 ‘산미증산계획“에 의해 시작됐다.


부평 뜰은 지금 택지개발로 대규모 아파트단지와 공업지대로 변했지만 원래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곡창지대였다. 부평을 중심으로 서울 영등포까지 펼쳐진 너른 들판이 부평평야였기 때문이다.
1899년 경인철도가 개통 전까지만 해도 부평 뜰은 농토이기 보다는 갈대가 우거진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물이 빠진 서해 갯벌의 모습을 한 처녀지였던 것이다. 경인철도 부평역에서 바라 본 부평 뜰은 까마득했고, 갈대벌판 가운데 드문드문 논이 있을 뿐이었다.

이 뜰 한복판을 꿰뚫고 흐르는 한다리개(大川)에는 하루 두 번씩 서해의 밀물과 썰물이 한강을 타고 들락날락 했다. 한강의 수위가 떨어졌을 때는 소금기가 섞인 짭짤한 물이 드나들었다.
굴포천을 끼고 있는 부평 뜰에 농사를 짓기 위한 노력은 59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조 태종 17년(1417년) 개발에 뜻을 품고 있던 ‘우희열’이라는 사람이 부평 뜰을 개척하겠다고 임금에게 상주(글로 적어 자기 의견을 올리는 것)한다.

태종은 부평부사였던 ‘목진공’에게 농민들의 의견을 들은 뒤 추진하도록 했으나 농민들은 자신의 방죽 논에 피해가 미칠까봐 반대하고 나섰다. 목진공은 이 같은 내용을 그대로 적어 품계를 올렸다.
태종은 중신회의를 열어 의견을 수렴하니 정부 도움 없이 자기 자본으로 만들겠다는데 거절할 명분이 없다고 결론을 내려 우희열에게 부평 뜰의 개척을 허락했다. 우희열은 기존 농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종전 400결의 농토를 1천결로 넓혔다. 당시 1결은 수확량에 따라 2천753평에서 1만1천36평까지 6등급으로 나눠 그 면적을 달리했다.

그러나 여름철이면 홍수로 한강물이 범람해 물바다를 이루었다. 방수대책이 없는 탓에 해가 갈수록 되풀이 하는 침수로 개척된 부평의 뜰도 초지가 무성한 갯벌로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5천 정보의 대평야에는 항상 고여 있는 물이 적을 뿐 아니라 관개시설에 쓸 수원이 없어 오직 빗물에 의존해 농작물을 심을 수밖에 없었다. 또 7~8월 장마철이면 하루아침에 농토는 물바다로 돌변하고, 한강의 범람과 함께 벌판에 고인 물은 한강으로 미처 빠져 나가지 못해 농작물은 썩어 문드러졌다.

부평 뜰은 비옥한 토지, 경인철도와 한강 등 뛰어난 운송 수단, 서울과 인천 사이의 천혜의 입지 조건 등을 두루 갖췄으나 수해 등으로 인해 그대로 방치되다시피 했다. 때문에 농토가 아닌 사냥터로 이용되기도 했다. 충렬왕 때는 매사냥 터로, 양녕대군 시절엔 수렵장으로, 인근 사냥꾼들에게는 물오리와 기러기를 잡는 수렵 터로 사용됐다. 우거진 갈대숲을 휘젓고 다니는 사냥꾼들이 나타나는 지금의 청라경제자유구역인 동아매립지와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부평 뜰이 본격적인 농토로 변모한 때는 일제 강점기다. 일본인 지주들은 총독부를 등에 업고 농지를 헐값에 사들이기 시작했다. 1923년에는 조선총독부의 ‘산미증산계획’ 바람을 타고 부평수리조합 설치를 인가 받았다. 이 때 저수지나 보 등 수리시설에서 물을 받아 농사를 짓는 몽리(蒙利) 구역이 부천군의 부내면 • 계남면 • 오정면 • 계양면과 김포군 소재 고촌면 • 양서면 등으로 그 면적이 3천 600정보에 달했다.

이들 일본인 지주는 신곡리에 물을 빼고 끌어 댈 수 있는 양배수 기관실과 한강 범람에 대비한 방수제를 쌓고, 동서로 양수대간선을 설치했다. 착공 2년만인 1925년 봄, 통수에 성공해 새로운 경작에 착수했고, 농지개간 사업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해 여름 ‘을축년 대홍수’라 일컫는 재앙을 만났다. 중부지방의 물난리로 한강이 범람해 한강변 방수 둑이 무너졌다. 부평 뜰 전체가 온통 물에 잠겨 저지대인 고니새말(신복동)과 영성미(삼산동 신촌)의 오막살이집이 물에 떠내려가고, 농작물이 일주일 이상 흙탕물에 쓸려 나갔다.
당장 입에 풀칠할 것조차 없던 농민들은 홍두평(김포 • 황해사 농장 • 한강방수제) 둑막이 공사에 잡부로 나가야만 했다.

이후 부평수리조합은 한강변 방수제의 높이를 과거보다 10배가 넘는 큰 보둑으로 막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해대책을 세운 일본인들과 약삭빠른 한국인 지주는 농민들이 수해로 실의에 빠진 틈을 타 본격적인 농지 사냥에 나섰다.
이들은 헐값에 농지를 사들여 농장을 차렸고, 수리조합은 이들 농장주들을 상대로 영업을 했다. 이 바람에 소작인들은 빚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일본인 지주와 한국인 부호들을 중심으로 대농장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중 반전농장은 친일파 송병준이 중리 땅을 사들였고, 수진농장도 내리 땅을 매입해 반전 • 수진 • 교전 등 대농장이 등장했다. 당시 부평지역에만 일본인 지주가 30명을 헤아릴 정도로 대농장이 유행했다.

수리조합은 물이 닿지 않는 고지대의 황무지를 싼 값에 사들여 2, 3단씩 물을 끌어들여 농토를 만들었다. 1943년 부평수리조합은 ‘한강수리조합’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952년에는 오정지구 232정보를 확장해 몽리지역을 4천800정보로 넓혔다.

이어 김포지역까지 확장, 양촌 • 화성 • 대곶 • 검단 • 대능리 등 간척지까지 손을 대 몽리지역이 7천800 정보에 이르는 큰 조합으로 탈바꿈했다.
한강수리조합은 1970년 사옥을 중심지인 경기도 김포읍 사우리로 옮겼고 이름도 ‘한강농지개량조합’으로 바꾸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하천살리기추진단 - 
  • 인천광역시 연수구 갯벌로 12 1503호(미추홀타워)
  • 대표전화 : 010-3238-5490
  • 팩스 : 032-440-8686
  • Copyright © 2013 Icriver.or.kr. all rights reserved
ND소프트